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시다
하우워스, "탄생을 기억할 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

2011년 06월 01일 (수) 미주뉴스엔조이 발췌 김성회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grassroot )

'기독교 윤리학의 세계적인 석학',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스텐리 하우워스 교수. 그가 일군 학문적 금자탑 저편에는 심각한 정신병 환자인 아내로 인해 겪어야 했던 처절한 외로움과 절망의 시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우워스 교수는 지난 2월 16부터 이틀간 풀러신학교 심리학부가 마련한 Integration symposium의 주강사로 참석해 아내로 인해 겪었던 어려움을 담담히 고백했다. 그의 부인은 심한 조울증 환자였다.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하겠다고 고집하고, 하나님의 신호를 기다리며 잠들기를 거부하고, 환시와 환청을 반복했다. 그런 아내를 보살펴야 했고, 동시에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아들을 아내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아내의 정신병으로 인해 미칠 듯한 고독함을 감내하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진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우워스 교수는 내러티브 형식을 자신의 주된 학문적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학자답게 이야기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신학적으로 조명했다. 정신병 환자의 가족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과정이 자신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하우워스 교수는 이번 심포지움에서 세 차례에 걸쳐 강의했다. 강의 내용을 앞으로 네 번에 나눠 연재하고, 하우어워스 교수와 참석자들의 질의응답을 마지막으로 올릴 예정이다. 다음은 세 번째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과 평론가들이 <한나의 아이>를 읽고 비평을 해줬다. 모두에게 고마웠다. 특히 고마웠던 것은 학계나 전문가가 아닌 분들이 보내주신 편지였다. 그들은 내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도움이 됐다는 글을 보내줬다. 나는 예전엔 이런 반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은 내 글이고, 그 글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을 내가 통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 글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들의 인생을 이해하는데 미력이나마 보탬이 됐다면 내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Thanks be God)"이다.

이 자서전을 쓴 최초의 이유는 친구들이 권해서였다. 그런 친구들에게 고맙고 쓴 결심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몇몇 분들은 책을 아름답게 썼다고 칭찬해줬다. 듣고 싶었던 칭찬이었다. 난 이 책이 아름답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나의 부모님과 폴라와 아담과 내 친구들, 이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인생이 담겨지도록 책을 쓰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나는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했으나 그러한 노력도 읽는 사람에게는 오독의 여지를 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라는 연약한 존재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앤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 정말 진실만을 썼는지 어찌 알겠나. 나는 앤에 대해 최대한 그의 마음을 느끼며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것을 통해 앤을 그전부터 알았거나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모든 이들이 그가 그의 인생에서 겪어야만 했던 그 아픔에 공감하길 바랐다. 이런 정신질환의 공포 중 하나는 이 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고통(pain)이라는 말이 정신질환자가 겪어야만 하는 그 아픔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는 아닌 것 같다. 여하튼 그들은 아픔을 겪는다. 그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는 우리가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스탠리 커벨이 관찰한 바로는 정신질환자들은 자신의 세계를 고마워할 줄 아는 능력이 결여되어있다고 봤다. 그러한 그들의 세계는 사실 우리의 세계와 그다지 멀지 않다. 이러한 커벨의 말은 우리가 소위 "정상"이라고 부르는 세상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상기시켜준다. 우리는 이러한 연약함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정신질환자들을 멀리하게 된다.

<한나의 아이> 이야기를 좀 더 큰 틀에서 해보고 싶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철학적이나 신학적으로 이 내용을 들여다보는데 더 도움이 될 듯하다. 자서전에서 볼 수 있듯이 정신질환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병이다. 정신질환이 보여주는 가장 큰 도전은 그 병을 가진 사람이 "정상"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있다고 본다. 정신질환은 인생을 부순다. 하지만 이 병을 가진 사람도 아닌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그런 관점 하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든 과제로 다가온다.

나 역시 내가 이 자서전을 쓰면서 내가 여태 무엇을 해왔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책을 쓰기 전에 몰랐던 것을 더 알게 된 것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좀 민망하다. 내가 책에 제시해 놓은 것들은 질문을 가진 수많은 이들에게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책을 다 쓰고 나니 조금 달라진 자신을 느낄 수는 있었다. 책을 읽어본 많은 사람들이 "책을 쓰는데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셨겠어요"라고 말한다. 그 책으로 인해 내가 너무 노출되지 않았냐는 걱정이었다.

신학과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공부하고 생각하다 보면 인간은 취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많이 생각해보게 된다. <한나의 아이>를 통해 드러난 나의 취약함은 좀 다른 순서를 가진다. 이 자서전을 쓰면서 내가 취약해질까하는 걱정보다는 내가 이 책을 써야만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원래 책의 부제는 "신학적 회고록"이었다. 출판사의 홍보 부서에서 그런 제목으로 나가면 책 판매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면서 다른 부제를 고려해 봐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온 부제가 "신학자의 회고록"이었다. 양쪽이 서로 만족할만한 부제였다.

부제가 책의 성격을 아주 잘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다. 여하튼 나는 "신학적 회고록"이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들긴 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장르 자체가 신학적 주장을 담고 있었고, 독자들이 그걸 읽어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신학적 고찰은 이 책에 담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아버지 장례식의 설교라던가 아이들한테 들려준 이야기 등 몇 군데 드러나는 신학적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책 내용 자체에 녹이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다. 독자들이 내가 내용적으로 녹여서 적은 이런 이야기들을 찾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책 자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학적 회고로 구성돼 있다. 새라 코클리가 내 글에 대해 "어거스틴 방식의 고백을 보여주는 글"이라고 평한 것을 보았다. 나는 내 자신의 분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나 자신이나 내 자서전이 감히 어거스틴의 회고록과 비교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청중 웃음)

코클리와 칼은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주목했다. 코클리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 완전히 이해되기를 바라는 기독교인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통해 이해해보려 시도하고 있었다. <한나의 아이>는 참회록처럼 보이려고 포장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모든 기독교인이 ”참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만일 당신이 어거스틴이 제안하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다르게 만든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의 명민함과 신학적 통찰력을 생각해 볼 때, <참회록>을 모방해보려고 시도하진 않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선 누구도 어거스틴의 <참회록> 같은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우리는 그런 글을 쓸 만한 언어나 영혼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패트노는 <한나의 아이> 끝 부분에 나오는 루박에 대한 내 인용에 관심을 보였다. 내 인생의 편린들을 짜 맞추어 이야기를 엮어 가는 과정을 통해 책의 성격을 보여주고 싶었다. 패트노는 특히 내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세 여인의 이야기가 내 책의 중심축이라고 평했다. 내 어머니와 앤과 폴라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내 인생이 이런 형태를 갖추게 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스탠리 하우워스라는 내 자신의 의도를 넘어서는 무엇이었다.

페트노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그(스탠리 하우워스)는 그를 기독교적 환경에서 키울 부모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담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앤과 겪었을 그 고통을 일부러 선택했을 리도 없다. 그가 폴라와의 관계를 계획해 놓은 것도 아니었다. 폴라는 그의 사랑으로 하우워스를 감쌌고 그가 다시 빛을 찾게 해줬다. 하우워스는 폴라의 등장을 하나님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고 했다.

페트노는 <한나의 아이>가 '시간'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점을 서술하려는 나의 시도였다고 봤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나는 나의 인생이나 내 행동이 "연속적인 사건의 필요한 이유"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했고, 그것을 책을 통해 보여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려는 시도는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어거스틴의 <참회록>과는 다른 것이었다. 만약 한나(어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나는 우둔한 사람이 됐을 것이다.

나는 <한나의 아이>가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독자들이 읽어야 한다는 페트노의 생각이 맞았으면 좋겠다. 만약 내가 최근에 제프리 리스의 특이한 책 <결백한 성(性)의 로맨스>를 읽지 않았었다면 페트노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리스는 어거스틴의 "원죄"라는 독트린을 변호한다. 리스는 인간 전체의 죄가 최초 인류 두 명의 불순종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떼어놓고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고 봤다. 리스는 결혼이 성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로맨틱 소설적 입장을 어거스틴을 들어 옹호하려는 사람들과 논쟁을 한다.

리스는 어거스틴이 원죄를 논할 때 성과 관련한 행동들을 연관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고 지적하고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타락이란 오히려 "불복종"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만심에 기초해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죄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기 자신이 "인간적인 결정"을 내리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데서 비롯됐다고 봤다.

원죄는 우리가 "자신(self)"라는 것을 이해하는 틀이 하나님에 대한 복종 안에서였었어야 한다는 점부터 재앙의 시작이 된 것이다. 리스는 우리가 욕정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성과 원죄를 연결시켰다고 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성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독점을 사유화 하는 죄스러운 판타지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본 것이다.

리스는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출생"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펴봐야한다고 했다. 우리 자신이 독립적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의 그 좋은 증거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자기가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육체적 존재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가장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 출산이라고 했다.

이 육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힘든 존재로 만든다. 이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는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어린애 같은 질문을 하게 만든다. 어거스틴은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이 우리 정체성 확립의 문제라고 봤다. 어거스틴의 입장에선 우리는 전부 시작이 있었는데(출산) 왜 그 시작을 기억할 수 없는 가였다.

참회라는 것을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보면 "근원"라는 어린아이의 질문에 대한 탐험이었다. 이 질문은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참회록>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묻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세상 창조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이 창조된 세상에 내재된 자신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을 비웃었던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비웃는 꼴이 됐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어거스틴이 찾아낸 역동적인 탐험에서 제외시켰다. 무지한 짓이었다. 그들은 어거스틴이 자기 자신의 성취와 한계라는 기억 안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불쌍히 여기기만 할 뿐이었다.





▲ 파사데나에서 강연 중인 스탠리 하우워스 교수.

어거스틴은 기억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잡았다. 탄생이라는 것은 기억으로 제한된다. 탄생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부재(탄생의 순간을 기억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역자 주)가 바로 기억을 불가피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오로지 어거스틴이 자신의 존재가 유한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선이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통해서 어거스틴은 시간 안에 존재하는 자신 자체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그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있음을 탐험해가는 여정이었다. 어거스틴의 신에 대한 인식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신에 대한 인식은 그가 인생을 살아온 것에 반추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신과의 관계에서 의존성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라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신과의 관계에서 하고 있는 추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만들어낸 창조물 중 하나로 자신을 인식한 어거스틴은 신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근원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 자신에 대해서 하고 있는 인식 자체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참회는 그가 알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참회였을 뿐 아니라 그가 모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참회이기도 했다.

어거스틴은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고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내 어둠이 대낮처럼 환해지기 전까지는 내가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리스는 어거스틴의 자아에 대한 이해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어거스틴의 참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고정된 자기 정체성, 주로는 성 정체성에 대한 근대의 탐구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정체성이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는 욕망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으로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서전이라는 것은 자주 성적인 비밀을 포함하는 사적인 비밀에 대한 서사라는 비밀의 영역을 공개하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어거스틴은 자기의 자서전을 외적으로 공개되어 있고 공공의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구체적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도 시작에서 시작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지혜를 자기 자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각각의 개체로서의 인간의 시작이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근원 아래 시작됐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것 자체가 떨어질 수 없는 사건으로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회록>에서는 존재의 입안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드러냈다고 봤다. 인간 지적 정체성의 서술자는 오로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누구인지 진실하게 말씀해주신다. 그래서 리스는 인간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이 인간의 서술 능력에 대한 불완전함과 하나님의 실패 없는 서술을 비유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쓰는 이야기는 결코 확정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진실 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일한 분인 하나님을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만이 각 개개인에게 있어서 확정적인 이야기가 된다.

결국 신학이라는 것은 서사와 탐험의 조화를 이루는 학문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과 각 개인의 자아를 구성하는 서사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결국 자서전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신학이라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탐험을 얼마나 정직하게 써내려갈 수 있는 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개체가 창조된 과정을 탐험하는 것은 전체 창조 과정 가운데에 자기 자신을 놓는 데서만 가능하다. 지구, 바다, 바람 이 모든 것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라고 외치고 있다.

어거스틴이 탄생과 죄를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참회록>이라는 자서전 형태의 신앙 고백을 했다고 리스는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아담, 이브,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단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리스가 주장하는 어거스틴 방식의 기억에 주목해 줬으면 한다. 어거스틴이 <참회록>을 서술했던 방식과 내가 <한나의 아이>를 썼던 방식을 비교하는 것을 나는 꺼렸다. 누가 어거스틴과 같은 분과 비교되기를 원하겠는가.

리스가 보기에는 어거스틴은 <참회록>을 쓰는 내내 하나님을 경배했다. <참회록>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긴 기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하나님께서 읽어보시도록 <참회록>을 쓴 것이다.

나는 <참회록>과 같은 책을 쓸 수 있는 정도의 관계를 하나님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난 <한나의 아이>를 하나님을 위해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쓴 책이었고, 내 친구들과 내 독자들을 위해 책을 썼고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친구와 독자들이 생기길 바랐다.

많은 비평가들이 <한나의 아이들>이 다른 자서전과 다른 면이 있다고 지적을 했다. 레이 올슨은 "최근 자서전의 경향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위주로 한다는 점이다. 자서전이 일인칭 시점에서 써지는 것을 감안해도 그렇다. 저명한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워스의 <한나의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자기 자신보다 동료, 친구,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에 더 중점을 뒀음이 글을 통해 보인다"라고 했다. 다른 평론가는 "스탠리 하우워스가 책을 통해 '스탠리 하우워스'라는 이름을 놓으려고 한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저명한 신학자라니. 듣기 참 민망한 말이었다. 하우워스를 놓으려고 했다는 평가는 마음에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참회록>에 대한 모방이었으니. 살다보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나보다도 더 잘 전해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저리 맥케니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평을 썼는데, 그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우워스는 그가 이해하고 있는 대리인(agency)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하우워스의 이야기는 '우리는 우리 인생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우리의 대리인은 우리가 자각하고 의도한 대로 성장한 일부분이 말이 되고 믿을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하우워스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자신의 인생의 '가'라는 지점에서 '나'라는 지점으로 이동하는 계획도 열심히 세우고 움직이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맥케니는 책을 읽고 나서는 "하우워스가 해놓은 일은 사실 말하자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에게 일어난 일들이었다. 심지어 그는 휴가 하나도 계획해놓질 못했었다. 심지어 책의 장 별 제목조차도 이런 그의 인생을 반영하기라도 하는 듯하다. "생존", "인내", "기도" 등이 각 장의 제목이었다"라고 했다.

맥케니는 내가 이 책을 쓴 통찰력이 어거스틴이 <참회록>의 초반에 보여준 통찰력을 담았다고 했다. 어거스틴이 말한 사과와 나라는 논증이 그만의 독특한 신의 존재에 대한 통찰력이었다고 봤다. 이러한 맥케니의 관찰은 내 책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기여에 대해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평론가는 "나도 내가 뭘 하는지 몰랐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문장이 <한나의 아이> 전반에 자주 등장한다고 지적했다. 나도 그런 말을 자주 사용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맥케니의 지적처럼 나는 내 인생에 정직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그런 말을 자주 쓰도록 만들었던 것 같다. 내가 했던 일들이 사실은 내게 일어났던 일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맥케니는 내가 커피(하우워스의 부친)의 아이라는 점 역시 강조했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맥케니가 나의 어머니(한나)의 기도가 내 회고록의 중심 주제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기도가 내가 대리인(agency)을 이해하게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맥케니는 나에게 "당신은 평생을 기도하며 살아야 할 순간에 기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이해해하려고 노력해오지 않았나. 당신의 어머니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맥케니의 이해에 따르면 나의 어머니는 내게 기도하는 양식을 가르쳐 주셨고, 아버지는 내용을 주셨다고 봤다.

맥케니의 설명처럼 내가 사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을 책에 다 적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나의 아이>라는 책에 내가 하고 싶었거나 했어야 했거나 하는 이야기들을 모두 다 넣었었다면 책은 한정 없이 길어졌을 것이다.

내가 사실 꼭 했어야 했던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책을 쓰면서 비켄슈타인의 생각을 계속 했다. 그의 말처럼 시작을 쇼처럼 하고 싶었다. 말로 하기 보다는. 그것이 내가 아는 가장 기도에 가깝게 가는 방법이다.

맥케니는 내가 글 쓰는 방식을 관찰하고는 내가 근대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맥케니의 관찰은 정확했다. 내가 <한나의 아이>를 쓰는 방식을 보면 내가 경구(警句)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맥케니는 <한나의 아이>를 읽으며 "신학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우리(신학자)를 좀 더 발전하게 도와줄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맥케니는 <한나의 아이>를 읽고 나서 책에서 경구를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책 자체가 경구의 연장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경구라는 것이 결국 묵시록적인 의미를 가진다면 결국 내 책도 묵시록적인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였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책에서 표현된 부분 중 당신과 내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기독교인의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다. 묵시록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삶 말이다"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책은 근대성(modernity)의 반영임에 틀림없다. 부인하고 싶지 않고 부인할 이유도 없다. 근대적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나는 보여주려고 했다.

어거스틴의 이해처럼 우리는 탄생을 기억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 인생을 고른 것도 우리가 아니다. 탄생이라는 말에 대해 좀 더 말하자면 우리는 이렇게 주어진 인생에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거스틴은 탄생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나의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맥케니는 내가 앤(조울증을 겪던 아내)의 이야기를 앤에게 불평하지 않고 썼다는 점을 높이 샀다. 맥케니는 내가 앤에 대한 이야기를 적으면서 내가 느꼈을 고통과 감정을 그대로 전달했다고 했다. 읽는 사람들도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그는 내 글을 통해 내 인생의 일부분을 나눌 수 있었다고 했다.

맥케니는 앤의 이야기가 내 신학에 미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 말했다. 그는 내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잘 적었다고 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앤의 존재란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기독교인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를 묻게 만들었다.

그린 맥크라이트과 존 코웰은 목회적으로 신학적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조울증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이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적으로 아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책을 쓴 사람들이다.

그린 맥크라이트는 정신질환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러한 절망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그러면 이것을 절망(despair)이 아니라 다른 단어로 불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론으로 정신질환은 의미의 부재(lack of meaning)이라고 봤다. 악이 선의 부재인 상태인 것처럼 말이다.

그린은 "정신질환은 영혼으로 가는 모든 문과 창문을 닫는 일"이라고 했다. 그로 인해 병을 앓는 사람이 기도가 됐던 찬양이 됐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봤다. 모든 경험은 고통일 뿐이었다. 그 고통을 잊을 방법도 없다. 인생의 근원(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라고 정신질환을 진단했다.

존 코웰은 그의 책의 한 장 제목을 "어둠 속으로"라고 썼다.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증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그 증상을 다른 사람들한테 설명하는 것도 힘들어 한다. 우울하다는 말 같은 것으로는 우울증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의욕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코웰은 "당신이 우울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면 증상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내가 조증 상태가 되면 사람들이 왜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열정적인 에너지를 함께 나눌 수 없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 조증이던 우울증이던 결론은 격리요 어둠에 빠지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존 코웰과 그린 맥크라이트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이 정신질환이 주는 도전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둘 다 시편을 인용하며 어둠 속에서 주님을 찾는 자신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린에게는 결국 기도가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다른 이들이 그린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통해 그는 평안함을 얻었다고 했다.

존 코웰과 그린 맥크라이트는 그들이 만성적인 정신질환을 겪는 동안 결국 신앙심이 그들이 쉬운 답을 얻는 것을 막아주었다고 봤다. 그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것이 그저 "병"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에겐 그들을 지지해주고 지켜줄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내면의 힘이 친구, 가족들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자신을 돌보는 일에 책임을 져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 중 하나는 정신질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책으로 적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 둘의 책과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비교하며 맥케니가 말하는 것은 앤이 내가 어떻게 사고하는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난 사실 그런 분석에 동의하기 어렵다. 앤의 분노는 그녀가 그녀의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만들었었다. 그 점에서 앤의 인생은 그린이나 존의 인생과는 달랐다.

그녀의 인생이던 나의 인생이던 우리가 이 인생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고르지 않은 인생이었는데 그것이 정신질환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이 정신질환의 인생이 너무나 강력해서 '인생은 선물'이라는 명제를 깨닫지도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알지 못한다. 맥케니의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존 웨스터호프가 나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앤이 완전한 고독의 상태가 되어 자살을 시도했을 무렵이었다. 나는 그녀의 절대 고독이 너무 걱정이 됐었다.

"아니, 앤은 혼자가 아니야. 하나님이 앤과 함께 계셔." (<한나의 아이>에서 존 웨스터호프)

하나님 감사합니다.